아브라함은 100세에 낳은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삭을 죽이려 했으며 이삭은 그런 아버지에게 대항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램브란트는 아브라함의 순종과 아들 이삭의 순종을 어떤 눈으로 봤는지 20년 동안 그린 그림으로 살펴봅니다.
1. 하나님의 시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다음날 아침에 번제에 쓸 장작을 쪼개 준비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따라온 종들에게 따라오지 못하게 하고 번제에 쓸 장작을 이삭이 지게 하고 자신은 불과 칼을 들고 함께 걸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에게 여쭙습니다.
"아버지, 장작과 불은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얘야,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손수 마련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장소에 도착하여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가져온 장작을 벌여 놓고는 이삭을 묶어서 제단 장작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창 22 : 1-19)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했고, 다윗이 제물로 제사를 지냈으며, 솔로몬이 성전을 건설했던 장소는 현재의 예루살렘 황금돔 안에 있는 바위라고 구약 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바위는 솔몬몬 성전의 지성소가 위치했던 자리라고 합니다. (언약궤를 놓을 수 있게 바위에 홈을 팠으며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2.5큐빗X2큐빗임. 1큐빗=525mm=20.67인치)
물론,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했을 때의 모습은 아니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깎여 나갔습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는 이 바위에 기독교 제단을 세웠었고 바위 일부도 떼내어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과 이탈리아로 가져갔으며,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술탄 살라딘이 기독교 제단을 제거하도록 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이 장소가 무하마드가 하늘로 승천한 곳으로 믿고 있습니다.
2. 번제의 순서 (양 또는 염소인 경우)
○흠이 없는 수컷이어야 합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직접 죽입니다.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립니다.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뜹니다.
○제사장이 불붙은 장작 위에 머리와 기름기, 각을 뜬 고기를 장작 위에 벌여 놓고,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어서 주면 제사장은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웁니다. (레 1: 10-13)
○제물의 배를 갈라 내장을 다 꺼내야 합니다.
3. 아브라함의 순종
아브라함이 100세이고 사라가 90세일 때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순종하며 사흘 길을 걸어 이삭을 죽여 제물로 바치려 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번제의 순서를 지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에 대해 믿음 장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하자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되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아들 이삭에게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신앙을 물려받아 살아갑니다.
4. 이삭의 순종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이삭은 제법 나이가 들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몇 살이라고 나오진 않았으나 번제에 쓰일 장작을 메고 갔으니 장작의 무게가 약 30kg 이상은 됐을 것으로 추정하면 제법 힘을 쓸 나이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태울 장작을 메고 올라갈 때도 아버지가 그를 제물로 바치리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자신을 묶고 안수기도를 할 때서야 자신이 제물임을 알게 되었을 겁니다.
갑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고 묶고 장작 더미 위에 올리려는 늙은 아버지 (116세 130세 정도로 추정)는 힘으로 대항할 수 있었으나 그는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으며 아버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복을 받아오셨는지에 대해 세세하게 어머니 사라와 아버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도 하나님에 대해 믿고 있었고 아버지 아브라함을 전적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에 동의하고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카라바조의 그림에는 이삭이 느끼는 극도의 공포를 그리고 있지만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참고로, 구약학 학자 중에는 아브라함이 사라 몰래 이삭을 데려갔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건 후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살고 사라는 이삭을 데리고 헤브론에서 따로 살았습니다. (창 22:19/ 23:2)
이삭은 어머니 사라가 127세에 죽은 후 (사라가 90세 때 이삭을 낳았으니 어머니 사라가 죽은 해에 이삭은 37세였습니다.) 40세 때 아내 리브가를 맞이했고, 60세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는 결혼 과정에서도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리브가와 결혼했습니다.
그가 나이 들어 눈이 보이지 않을 때 야곱과 아내 리브가가 술수를 써서 에서의 장자권을 뺏는 축복기도를 받게 되고 이삭이 이를 알게 되나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알고 순종합니다.
흉년임에도 이삭만 많은 복을 받아 부자가 되자 블레셋인들이 질투하여 우물을 막아버리고 떠나라고 요구할 때도 다투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해 또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오면 이번에는 다른 목자들이 와서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블레셋 왕은 이삭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음을 깨닫고 이삭과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창 26:28-29)
이삭은 180세에 죽을 때까지 순종하며 살았고 이웃들과는 다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삭에게 큰 복을 내리셨습니다.
말없이 제물이 되기를 순종한 이삭은 인류를 위해 제물로 드려진 예수님, 자신을 태울 장작을 메고 올라간 이삭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과 대비되면서 이삭은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하겠습니다.
5. 램브란트의 작품으로 보는 이삭의 순종과 희생
램브란트는 30년에 걸쳐 이삭의 이 사건을 소재로 5개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5.1 램브란트의 생애
그는 1606년 7월 15일 레이든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는 집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나 레이든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고 14세에 레이든 대학에 진학했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중퇴하였고 반 스바넨뷔르흐 밑에서 도제 생활을 3년 간 했고, 라스트만 밑에서 6개월 동안 도제 생활을 하다가 화가로 독립했습니다.
램브란트는 독립 초기에는 주로 노인들을 소재로 늙은 수전노, 늙은 토비트와 안나, 늙은 예언자와 사도들을 그렸으며, 1631년 말부터는 암스테르담 사람들의 초상화을 그렸고 그는 주목 받는 초상화가가 됩니다.
외과 의사 조합의 주문으로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제작하여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아 많은 정보는 없지만 그는 자신의 자화상을 100여점 남겼습니다.
평민 출신인 램브란트는 1635년 시장의 딸인 사스키아와 결혼을 해서 자녀 4명을 낳았지만 3명은 모두 유아기 때 죽고 아들 티투스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시스키아가 아들 티투스를 1641년에 낳고 1642년 시름시름 앓다가 30세의 나이에 죽으면서 불행이 찾아옵니다. 작품이 반환되는가 하면, 보모로 고용한 과부 헤르트헤 다르크와 사실혼 관계임이 알려져 명성에 흠이 갔고 그녀와 헤어지자 헤르트헤는 혼인 불이행에 대한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매년 별거 수당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티투스를 엄마처럼 보살펴 주던, 하녀로 일하던 헨드리케 스토펠스(농부의 딸)와 동침은 하면서 결혼을 하지 않아서 여러 차례 교회 재판소에 불려나가 고초를 겪었습니다. 헨트리케가 딸(코르넬리아)을 낳기도 했습니다.
램브란트는 대저택을 사면서 빚을 지었고 그의 소비벽이 심해 생활이 문란해 재산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팔 수가 없어서 빚을 지고 집에서 쫓겨났고 소유물을 잃고는 1656년 (51세) 파산 선고를 받고 램브란트는 시외곽 유대인 지구로 이사를 해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헨드리케 마저 1663년에 페스트로 세상을 떠났고, 1668년에는 아들 티투스도 결핵으로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끼니마저 거르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죽기 1년 전인 1668년 명작 '탕자의 귀환'을 그렸습니다.
아들 티투스가 죽었던 해이며 그가 비참한 말년을 보내던 때였습니다.
자신을 돌아온 탕자로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한 그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비참한 생활 속에서 그린 그의 그림이 더 가슴에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1669년 10월 4일, 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63세)
당시 공증인은 "옷 한 벌, 손수건 여덟 장, 동전 열 개, 화구 하나, 그리고 성경 한 권"이 그가 남긴 물건 전부라고 기록했습니다.
5.2 1635년 (29세)
네델란드 출신 램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은 30년에 걸쳐 이삭의 이 사건을 소재로 5개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그 중에서 1635년에 그린 이 작품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단호함이 보이는 유화 작품이며 램브란트의 대표작입니다.
이삭은 손이 뒤로 묶여 있고 아브라함은 손으로 이삭의 얼굴을 쥐고 있습니다. 이삭보다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순종에 중점을 둔 작품입니다.
천사의 만류로 아브라함이 칼을 놓치고 있는 찰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1635년에는 램브란트가 시장의 딸인 사스키아와 결혼을 한 해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자신감이 넘칩니다.
5.3 1636년 (31세)
1635년에 그렸던 그림을 한 제자가 베껴 모사품을 만들었습니다. 램브란트는 이 모사품을 1636년에 다시 손을 대서 덧칠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왼손이 이삭의 얼굴을 가리고 있고 천사가 황급히 아브라함의 손을 잡아 칼이 떨어지고 있는 모습은 같으나 아브라함의 표정이 더 놀라워하고 있고 천사도 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접근하는 방향도 다릅니다. 하늘로부터 아래로 급히 내려와 아브라함의 손을 잡은 모습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숫양이 아래에 보인다는 점도 다릅니다.
5.4 1645년 (39세)
램브란트는 낳았던 자녀 4명 중 3명을 잃었으며, 아내 사스키아가 1642년에 죽었고 아들 티투스가 4살 때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뭔가를 설명하는 동판화입니다.
이삭은 번제에 쓰일 장작을 잡고 있는데 표정이 어둡습니다. 아브라함은 왼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명령임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삭은 나뭇가지 묶음을 손에 잡고 있습니다.
램브란트는 작은 가지들을 묶은 것으로 그렸습니다만 창세기 22:3절에는 "...번제에 쓸 장작을 다 쪼개어 가지고서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그 곳으로 길을 떠났다."라고 했습니다.
큰 나무로 장작을 쪼개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시체를 태우기 위해서는 많은 나무가 필요하며 오래 탈 수 있는 장작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삭이 지고 갈만큼 무거웠을 겁니다.
5.5 1655년 (49세)
램브란트가 파산 선고를 받기 1년 전에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생활은 궁핍해 진 때였을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보는 눈이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첫 작품을 그린 지 20년 후인 49세 때 그린 동판화입니다.
이삭의 손은 묶여 있지 않으며 무릎을 꿇고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자신을 맡깁니다. 아브라함은 왼손에 칼을 잡고 있고 번제단 주변에 피를 뿌릴 수 있게 피를 받는 그릇도 그려져 있습니다.
천사가 황급히 아브라함을 말리고 있습니다.
5.6 1655년 (49세)
네 번째 작품과 같은 해에 그려진 소묘입니다.
이삭은 무릎을 굽히고 손을 배 위에 모으고는 목을 뒤로 젖히고 있으며 아브라함은 칼로 이삭의 목을 그으려 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아브라함의 머리에 손을 얹고 말리고 있습니다.
램브란트는 나이가 들어 이삭이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잠잠히 순종한 것을 느끼고 그의 그림에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29세 젊을 때, 아브라함의 결기 있는 순종의 모습을 그렸다면 50세에는 조용히 순종하는 이삭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6. 카라바조의 작품
카라바조는 아브라함의 냉혹함과 이삭이 느끼는 극도의 공포를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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