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후로 일어난, 우리가 잘 모르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살핌과 우리 선조들의 사명감과 희생 덕분에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한 국가의 독립과 자유는 결코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1.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
이승만 대통령은 좌익이었던 조봉암 선생이 우익으로 전향한 후 그를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농지개혁을 추진시켰습니다.
1949년 6월 23일 농지 개혁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1950년 4월 20일 농지개혁을 완성했습니다.
농민들에게 토지 분배가 4월부터 시작되었고, 5월부터는 토지 장부 열람이 개시되었습니다.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으나 농민들은 토지 대장 열람을 통해 최소한 내 땅이 있으며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덕분에 남한의 농부들이 북한의 침략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2. 남조선 노동당(남로당) 붕괴와 남한에서의 봉기 실패
A. 남로당 창당과 남한에서의 반란. 폭동 선동
남로당은 1946년 11월 23일 서울시에서 조선공산당, 남조선 신민당, 조선 인민당 등 3당이 합당하며 만든 정당입니다.
1대 당수가 여운형, 2대 당수는 허 헌, 3대 당수가 박헌영이었습니다.
남로당은 1946년 10월 1일의 대구폭동, 1948년 4월 3일 일어난 제주폭동,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발생한 여수. 순천 반란 사건에 개입하였습니다.
이 3건의 사건은 대한민국의 탄생을 폭동과 반란으로 저지하고자 소련 공산당, 김일성, 박헌영과 남한 내 좌익 세력이 힘을 합쳐 일으킨 비극적 사건입니다.
B. 남로당 공작원 체포와 당원들의 전향
1950년 3월 1일 남로당 특별 공작원 196명이 체포되었고 3월 17일 남로당 거물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었습니다.
북한이 남한측에 민족진영 지도자 조만식과 맞교환을 제의했을 정도로 거물이었습니다.
1949년 남조선 노동당 서울시 지부장 홍민표가 전향을 하고 이어서 33만 명이 자수를 하여 남조선노동당이 와해되었습니다.
박헌영은 북한군이 남침을 하게 되면 남로당원들이 무장봉기를 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6.25 전쟁 후 박헌영은 김일성의 전쟁 책임 주장의 희생양이 되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3. 춘천 주둔 제8연대 2개 대대 월북
A. 2개 대대 월북 사건
대한민국 군대 내의 남로당원들을 색출하는 작업이 벌어지자 위기를 느낀 두 대대장이 차례로 대대 병력을 이끌고 월북하였습니다.
1949년 5월 4일 제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은 북한군과 미리 내통한 후 대대 병력에게 야간 훈련을 한다며 북쪽 행군을 명령했습니다.
456명 대대병력 중 239명이 남한으로 도주하여 왔고 217명은 표 소령의 간계와 북한군의 포위 때문에 인민군에게 체포됐습니다.
다음날인 1949년 5월 5일 제8연대 2대대장 강태무 소령도 북한군 보안대를 공격한다고 속여 500여 명의 부대원을 출동시킨 후 38도선을 넘었습니다. 북한군과 교전이 이루어지자 강소령은 투항하자고 했으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7중대는 투항하였습니다.
143명이 필사적으로 탈출하여 남한으로 돌아왔습니다.
B. 대대 월북 사건의 결과
춘천지역에 있던 종북 세력들이 모두 사라져 6.25 때 춘천지역으로 남하하던 북한군을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4. 미군의 참전 결정과 UN 참전
북한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한 후 바로 남하하지 않고 3일 동안 머물렀는데 이 사흘이 전쟁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 시각으로 6월 28일 (한국은 6월 29일) 17시 국가안보회의가 열렸고 처음엔 해공군 위주의 소극적인 지원을 맥아더에 지시를 했으나 맥아더가 2개 사단 정도의 육군이 필요하다고 전문을 보내자 육군 참모총장은 1개 연대 전투단만 투입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지상부대를 지휘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UN도 59개 회원국 중에서 33개국이 안전보장 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였고, 영국,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등 6개국이 군대 파견을 약속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 사령부는 1950년 7월 1일부터 부산항을 통해 수송작전을 개시했고 7월 5일부터 전투에 참전했으며 7월 10일부터는 선박 수를 증가해 밤낮으로 UN군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송했습니다.
5. 영천 방어 성공
A. 다부동 전투 (1950년 8월 3일 ~ 8월 29일)
김일성은 전선 사령관 김책에게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명령은 8월 말까지로 변경되었지만 북한군은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가려했습니다.
북한군은 소위 '8월 대공세'를 시작했고 1950년 8월 3일부터 8월 29일까지 경북 구미시 해평면 일대와 경북 칠곡군 가사면 다부리를 중심으로 수암산과 유학산 일대에서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백선엽 장군을 비롯한 국군이 방어에 성공합니다.
북한군의 8월 대공세는 실패했고 국군은 반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B. 영천 전투 (1950년 8월 6일 ~ 9월 22일)
1950년 8월 6일부터 9월 22일까지 경주를 거쳐 대구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2군단 15사단에 맞서 국군 8사단, 7사단이 주축이 되어 벌인 전투입니다.
영천은 위 ↑ 부대 배치도에서 보시듯이 대구와 경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당시 서쪽 방어선은 낙동강이었고 북한군은 북쪽 방어선을 뚫고 부산으로 진격하려 했습니다.
보현산 지구, 안강-기계, 신녕-조림산, 영천에서 싸웠습니다.
1950년 9월 6일 영천읍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이후 수차례 공격해 탈환했습니다.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 후 안강-기계에 있던 수도사단과 신녕 지구 6사단의 반격이 9월 22일까지 계속됐습니다.
유재흥 준장이 (1950년 9월 소장으로 진급) 2 군단장으로 지휘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인천 상륙 작전(9월 15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수세에만 몰리던 국군이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 지도상에 데이비드슨 선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는 낙동강 방어선이 뚫릴 경우 미군이 안전하게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도록 정한 최후 철수 방어선입니다.
9월 6일 영천이 함락됐을 때 그 당시 전선과 대구를 포기하고 데이비드슨 선으로 철수하는 방안도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합니다. (마산-밀양-울산으로 잇는 방어선)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대구를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고 결기를 보였고 이와 더불어 워커 중장의 의지가 결전을 독려했습니다.
데이비드슨 선도 만들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는 증거입니다.
6. 북한의 특공대 600여 명 수장 시킴 (대한 해협 해전)
A. 대한 해협 해전 개요
북한에서 특공대 출신 600여 명이 향후 미군 지원 병력과 전쟁 물자가 들어올 부산을 교란시키려고 1000톤급 무장 수송선으로 6월 25일 동해 해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남한은 전투함이 한 대도 없었습니다. 해군 장병들의 성금과 가족들의 바느질삯 등을 모으고 정부에서 지원한 지원금을 합쳐 1949년 10월 17일, 전투함 1대를 미국에서 구입했습니다.
이 배가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701)입니다. 백두산 함으로 동해안을 순찰하다가 방어진 근처에서 무장 수송선을 발견하여 교전했습니다.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인 최영섭 소위가 견시병의 보고를 받아 함장(최용남 중령)에게 보고하고 6월 26일 0시 30분 포격을 시작하여 격렬한 교전을 한 끝에 1950년 6월 26일 새벽 1시 25분 침몰시켰습니다.
0시 30분에 처음으로 포를 쏘고는 놀랐답니다.
너무 소리가 크고 배가 흔들렸다고 합니다.
적함을 격침시키기 위해 위험을 안고 가까이 접근해서 포를 쏘았고 드디어 명중시켰습니다.
김창학 이등병조와 전병익 일등병조는 전사했습니다.
B. 대한 해협 해전 승리의 의의
그 결과, 전쟁 첫날 전쟁의 주요한 항구이자 교두보인 부산항을 지켜낼 수 있었으며, 유엔군 해상 교통로를 보호할 수 있었고 전쟁을 치르기 위한 부산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 기간 중 부산항을 통해 들어온 병력(미군을 비롯한 UN군 16개국)은 연 590만 명에 달했습니다.
전쟁용 유류는 물론 대한민국 국민들의 식량도 바다를 통해 들여왔습니다.
백두산함에 대한 KBS 다큐 동영상 (2015년 6월 26일)을 참고하십시오.
▶KBS 다큐/ 백두산함, 운명을 바꾼 해전
위와 같은 이 모든 일들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지켜 주시려고 도와주신 것입니다.
7. 함께 보시면 좋은 글
아래글을 같이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 가는대로 쓴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 많은 여인, 베다니 마리아 (2) | 2022.09.25 |
---|---|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尙何言哉 (1) | 2022.09.25 |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Lead, Kindly light) (0) | 2022.09.15 |
안타까운 '사랑하다'는 표현-너무 흔한 '사랑' (0) | 2022.08.25 |
이혼하려고 생각 중인 분만 읽어 보십시오. (0) | 2022.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