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尙何言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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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쓴 글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尙何言哉

by 숲의새 2022. 9. 25.

이름이 이연(昖)선조가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는 조서에 쓴 말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적었습니다. 그만큼 선조는 신하에게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명량의 이순신
영화 명량의 이순신

 

1. 이순신이 체포됨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부산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가토의 경쟁자였던 협상파 고니시로부터 받고 선조가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이를 막으라고 했으나, 이순신은 고니시의 정보를 믿지 않았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가토가 부산의 다대포와 서생포에 상륙하자 대간이 이순신을 잡아 심문할 것을 요청했고 비변사도 이에 동조했습니다. 

선조는 그에게 세 가지 죄를 물었습니다.
'조정을 기만해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놓아줘 나라를 저버린 죄, 남의 공을 가로채 모함한 죄'.(선조실록 1597년 3월 13일) 

1597년 음력 2월 26일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체포조 옆에는 원 균이 있어 군비일체를 인계했습니다.

3월 4일 한양의 감옥에 갇혔고 3월 12일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3월 13일 선조는 이순신을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판중추부사 정탁의 간절한 구명 상소로 4월 1일 석방됐습니다.

이연 선조는 1592년 개전 14일만에 도망하여 백성으로부터 조롱과 비난을 받았고 그 화풀이를 전쟁 중인 장수와 의병장들에게 했습니다. 의병장 김덕령은 전쟁 도중 반란죄로 처형되었습니다.
이순신은 민심을 얻고 있었고 군사력이 있었습니다.

2.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기복수직교서
기복수직교서

 

기복수직교서
1597년 8월, 선조의 부름을 받고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같은 해 9월 명량해전에서 배 13척으로 왜선 133척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둔다. 이 고문서는 선조가 이순신을 내친 것을 사과하며 그를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출처 : 아시아경제 2011. 04. 28)

 

1597년 8월 3일, 이순신의 손에 한 통의 편지가 쥐어진다. 선조가 내린 교서다.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그의 눈이 한 곳에 멈춰선다.

'그대의 직함을 갈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역시 이 사람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었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 같이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라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亦出於人謀不臧而致今日敗衄之辱也 尙何言哉 尙何言哉

선조가 다섯 달 전 그를 내친 일에 대해 사과하는 말이었다. 선조의 진심어린 후회가 이어졌다.

1597년 원균이 7월 15일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고 목숨을 잃자 선조는 그제야 이순신을 다시 생각한다. 이순신을 통제사직에서 물러나게 한 일에 대한 깊은 후회를 담아 내린 교서가 바로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다.
기복은 어버이 상중에 벼슬자리에 나아간다는 의미고, 수직은 통제사직을 준다는 뜻으로 '기복수직교서'는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에게 벼슬을 내린 교서를 말한다.

'기복수직교서'에는 후회와 더불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에 임명하려는 선조의 뜻이 담겨있다. 선조는 백성을 사랑하고 부하를 아꼈던 이순신의 정신을 다시금 떠올려 그가 흩어진 군대를 모아 남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교서 말미에 써 있는 이 말은 당시 선조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제 그대를 평복 입은 속에서 뛰어 올려 도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등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도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다가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요해지를 지켜줄지어다' (주요내용 출처 : 아시아 경제 2011. 04. 28일자)

경남 진주시 수곡면 운계리, 손경례라는 사람의 민가에서 지내고 있던 이순신에게 7월 22일 작성된 선조의 조서가 1597년 8월 3일 전해졌습니다. 출감한 지 4개월 만이었습니다.

3. 조서 후 이순신이 한 행동

A. 이순신은....

조서를 받은 이순신은 그날 밤에 바로 길을 떠났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하고 남은 전선을 수습하고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남 보성군 조성면에서 군량을 조금 확보하고 보성군청 군기창고에서 버리고 간 무기도 말 4마리에 실을 정도를 확보했고, 군사도 120명 정도 확보했습니다. 1597년 8월 9일이었습니다.

정유 년 (1597년) 추석 날 저녁에 군사를 합쳐 육전에 참가하라는  어명을 받았습니다. 
9월 7일 이순신은 보성에서  장계를 올립니다.

'신에게는 배가 열두 척이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해 항전하겠나이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한다면 이는 적이 바라는 바로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행록)

이 장계로 조선 수군은 명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8월 18일 전남 장흥군 회령포에 도착했습니다. 남해안 수군 방어기지가 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칠천량해전에서 남은 12척과 새로 합류한 1척=13척으로 조선 수군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이순신은 장수들과 병사들을 모아 놓고 결의를 밝혔습니다.

'임금의 명을 받았으니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나라 위한 한 목숨이 무엇이 아까우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9월 16일 명량해전에 출전해 승리했습니다.

120여명의 군사를 전남 보성에서 조달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 명량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13척의 배와 얼마되지 않은 군사, 그리고 해전에 필요한 많은 화포와 대포알, 조란탄, 그 많은 화약을 어떻게 조달했는 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닥까지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 등, 모든 것이 어려웠을 환경과 조건을 어떻게 극복했을 지,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해전 장면
해전 장면 (출처: 인물 한국사; 이순신)


B. 소설 칼의 노래에서 김 훈 작가는....

감옥에서 출옥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노량에서 전사하는 장면으로 소설 칼의 노래는 끝납니다.
작가 김 훈은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출처] 칼의 노래 (김훈)|작성자 콜라에 취한 마녀)

•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p57

•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주기를 나는 바랐다. p60

• 나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아무런 은총도 없는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p129

칼의 노래는 이순신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당시 민초들의 삶과 영민하게 왕권을 지키는 선조의 모습도 보여준다.

•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p44

•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p110

• 임금은 멀리서 보채었고, 그 보챔으로써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다. p220

이러한 과정을 지나 노량에서 전사하는 순간 작가 김훈은 스스로가 이순신이 되어 이렇게 적는다.

•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p320


4. 선조가 명량 해전 후 한 말

명량대첩 한 달 후 선조가 명나라 장수 양호를 접견했습니다. 덕담이 오가고, 선조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捕捉些少賊)은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非有大功伐)' 양호가 대답했습니다. '흩어진 전선을 수습해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하다.'(선조실록 1597년 10월 20일). 두 달 전 '할 말 없다'고 거듭 고백하며 복직 명령을 내리고, 그보다 다섯 달 전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던 지도자가 한 말이었습니다. 사소한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전투 때 전사했습니다. (출처 : 조선일보 박종인의 땅의 역사, 왜 그는 혁명을 택하지 않았을까,  2018.5.23일)

 

기복수직교서를 받은 손경례의 집에 있는 표석 (출처: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김희태)

이순신은 자신을 노리는 왜군의 칼과 반란을 두려워하는 임금의 칼, 두 개의 칼 사이에서 백성을 위해 싸우시다가 죽은 후 성웅이 되셨습니다.

어리석고 무능했던 군주와 주변 참모들은 시대를 읽지 못했고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누가 충신인지도 분별해 내지 못해 셀 수 없는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위대한 백성들은 살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대적했습니다.

5. 일본 도고 제독의 말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켰던 일본의 도고 제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를 영국의 넬슨 제독과는 비교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는 견줄 수 없습니다.
이 도고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순신 장군은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6. 선조실록의 사관은 이렇게 논평했습니다.

李舜臣爲人忠勇, 且有才略, 明紀律, 愛士卒, 人皆樂附......(中略)......其丹忠許國, 忘身死義, 雖古之良將, 無以加也.
이순신은 사람됨이 충용忠勇하고 재략才略도 있었으며 기율紀律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기꺼이 따랐다......(중략)......국가를 위하는 충성과 몸을 잊고 전사한 의리는 비록 옛날의 어진 장수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다. 
(『선조실록』 선조 31년(1598) 11월 27일자에 수록된 사관의 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