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독일의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 조의 반박문을 붙여 종교개혁을 주장했습니다. 그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어떤 선배들이 개혁을 주장하며 희생되었는지, 그의 주장이 어떻게 유럽으로 번져 나갔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봅니다.
1. 마틴 루터의 주장
1.1 95개 조 반박문
A. 1517년 10월 31일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 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게시했습니다.
95개 논제의 원제목은 “면죄부(免罪符)의 능력과 효용성에 관한 토론”이다. 95개의 명제는 내용상 일반적으로 8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다음과 같다. (출처 : 위키백과)
- 1) 속죄에 대한 규정(1 - 4조)
- 2) 교황의 사죄권의 한계(5 - 7조)
- 3) 교회법이 부과한 속죄에 대해 언급하면서 연옥 영혼에 대한 구원 문제를 취급(8 - 29조)
- 4) 면죄와 참회 그리고 사죄 문제(30 - 40조)
- 5) 면죄부의 구입과 면죄 시행의 남용(41 - 52조)
- 6) 면죄 설교와 복음 설교의 가치비교, 교리의 보화, 면죄부 판매 설교의 과장 등(53 -80조)
- 7) 면죄부 남용에 따른 평신도의 산발적 질문과 면죄 시행에 대한 공박(81 - 91조)
- 8)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인의 진정한 생활 언급 (92-95조)
B. 95개 조 반박문에서 루터가 주장한 것
- 1. 회개의 삶을 강조하고 고해성사 즉 사제들에 의해 집행되는 고백과 속죄는 불필요하다.
- 2. 면죄부는 죄책감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교황 자신이라도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 일은 자신의 수중에 보전하셨다.
- 3. 면죄는 죄에 대한 처벌을 교황이 사면할 수 없다. 그 사면권은 역시 하나님에게만 있다.
- 4. 면죄부는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아무런 효력도 없다. 교회가 부과한 처벌은 오로지 산 자에게만 적용되며 사망이 그러한 처벌을 취소시킨다. 연옥에 있는 영혼에게 교황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기도에 의할 뿐이지 자신의 관할권이나 열쇠의 권한에 의해서 자신의 힘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5. 참으로 회개하는 신자라면 면죄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은 것이며 면죄부는 필요치 않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참된 회개를 요구하신다.
- 6. 사람을 낚는 그물인 공로의 보화는 불필요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 십자가를 외치고 하늘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6] (출처 : 위키백과)
1.2 그가 종교개혁을 위해 주장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A. 평등한 만인은 오로지 신을 향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는다.
B. 성서만이 유일한 신앙의 원천이며 모든 신자가 자유롭게 성서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C. 만인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만인 사제주의를 주장하여 교황과 성직자, 평신도를 구분하는 것을 부정했습니다.
D. 성모와 성인 숭배를 폐지하고 영세와 성찬 의식만 존속해야 한다.
E. 연옥 (면죄부와 직접적 연관)의 존재 부정
1.3 가톨릭의 루터 살해 시도
로마 가톨릭은 루터를 체포하여 죽이기 위해 웜스에서 회의를 열어 의논해 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루터 지지자들은 100년 전에 후스가 그래서 죽었다며 반대했으나 루터는 간다고 말하고 갔습니다. 루터가 회의에 참석한 후 돌아오는 길에 가톨릭 교회에서 납치를 하려고 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제후(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그를 구해 바르트부르트 성으로 데려가 소문이 나지 않게 게오르크로 신분을 위장하여 수도복을 벗고 긴 수염을 기르게 하면서 10개월 간 보호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루터는 라틴어로 된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 신약 성경은 1522년 9월에 3천 부가 발간되었고 그 뒤에 신약성경만 80판이 인쇄되었습니다.
그 후 루터는 사람들을 모아 산헤드린이라는 번역위원회를 만들어 구약성경도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독일어 성경은 나중에 나온 킹제임스 성경보다도 문학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에 성경이 널리 퍼지게 됐습니다.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보지 못하게 막고 자신들의 편의대로 신자들을 조종했던 로마 가톨릭이었지만 이제 일반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오직 사제들만 라틴어로 된 성경을 볼 수 있었고 예배시간에 설교도 라틴어로 해서 신자들은 무슨 내용인지도 몰랐습니다.
2. 루터 전의 종교개혁 움직임
루터 전에 개혁을 주장하던 존 위클리프, 얀 후스, 사보나롤라, 윌리엄 틴들, 발도파와 에라스뮈스 등이 있었습니다.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과감하게 성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을 비판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화형을 당했고, 가톨릭은 존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시체를 불태웠습니다.
체코의 얀 후스는 가톨릭이 토론을 하자고 제의한 계략에 휘말려 갔다가 고문을 당한 후에 이단자 판결은 받은 후 1415년 7월 6일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때 얀 후스는 "오늘 당신들은 1마리의 거위(Husa)를 태우지만, 당신들이 태우지 못할 백조 1마리가 나타날 것이다(Dnes pečete hus, ale přijde labuť, kterou nebudete moci upéci)."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출처 : 나무 위키)
3. 루터 이후의 운동과 개신교의 출현
3.1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에 의해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루터보다 조금 후인 151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가 교회의 예배 형태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성경에 근거한 철저한 개혁을 주도하였다.
3.2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칼뱅의 세속적 신앙운동이 꽃을 피웠다. 칼뱅의 제자였던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로 가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신학을 전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 장로회 전통을 심었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국가 신앙은 장로회이다.
3.3 케임브리지 대학교 학생 때부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는 1549년 영문 성공회 기도서를 작성하고, 아침, 저녁기도와 감사 성찬례 때마다 라틴어 성서가 아닌 영문 성서를 쓰도록 하여 성공회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출처 : 위키백과)
3.4 루터는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 종교개혁을 추진했습니다.
농민들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주장에 동조하여 제후와 귀족들을 향해 농민 폭동을 일으키나 루터는 만민의 평등이란 신 앞에서의 평등을 뜻하고 현실에서의 평등을 말한 것이 아니다고 했으며 농민봉기를 강력 진압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이 때문에 루터가 특권층을 비호한다는 비난을 받고 농민층의 지지를 잃었습니다.
1525년 농민 반란이 진압되고 민중의 지지를 잃자 역사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3.5 가톨릭의 반격 : 대항 종교개혁
가톨릭도 스스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를 대항 종교개혁이라고 합니다.
가톨릭 교회의 주요 교리와 윤리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담고 있는 교리문답서가 발간되었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사용할 새로운 성무일도서가 개정되었으며, 세계 모든 서방 가톨릭 교회가 로마 전례로 통일하여 사용하게 될 개정판 미사경본이 간행되어 트리엔트 미사가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가타 라틴어 성경의 개정판이 발간되었으며, 지역교회의 주교들은 임지에 상주하는 의무를 다하면서 주일과 축일에는 강론을 하고 본당을 방문하는 사목활동에 충실하였다.
사제 지망자를 전보다 더욱 엄격하게 심사하여 사제로 서품 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가톨릭 교회가 체계화되고 일원화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출처 : 나무 위키)
3.6 개신교의 출현
루터의 개혁 운동은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독일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다른 유럽 지역에서는 상술한 가톨릭의 대항 종교개혁 때문에 그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츠빙글리와 그를 이은 칼뱅의 신학 역시 루터와 차별된 독자적인 종교개혁을 시도했고 세계주의적인 시도를 했다. 당대에서는 북유럽, 네덜란드, 영국, 스위스 정도에 머물렀다. 물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영향권을 넓혀갔기에 지금 한국에도 개신교가 존재하고 있다. 16세기 중후반 한때 가톨릭 교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였지만 가톨릭 교회에서도 새로운 반격에 나섰고, 17세기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강제력이 따르긴 했지만 유럽의 개신교도는 전체 인구의 20%선에 그치게 되었기에 결론적으로는 유럽 내에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곳이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를 비롯한 게르만 및 북유럽 문화권 정도로 한정되었다. 이후 유럽에서의 종교적 갈등은 마무리되고 19세기 말까지 유럽(및 북아메리카[51]) 외의 선교는 예수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에서 주도하게 된다. (출처 :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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