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 용의 출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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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 및 영화 감상

한산 : 용의 출현 ★★★

by 숲의새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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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순신! 한 시대를 구하신 위대한 영웅, 아니 성웅이시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싸운 장수로 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16세기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을 겁니다.

한산 : 용의 출현 포스터


1.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 상황


A. 일본은 약 100년간에 걸쳐 통일 전쟁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전투를 통해 전쟁 수행 능력이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습니다.

일본은 일찍 해외로의 문을 개방해 외국 문물이 빠르게 들어왔으며 조총 기술을 받아들여 일본군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포는 만들 수가 없어서 수입을 해서 썼으며 배가 구조적으로 약해서 수입한 대포도 배에 매달아 사용했습니다.
임진왜란 후 에도시대에서야 일본은 대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후 다이묘들의 내부 불만을 외부 침략을 통해 다스리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습니다.

B. 당시 조선은 일본이 명나라와 사대외교를 하고 싶다고 해서 서인 황윤길을 통신사로,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1590년에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왜의 침략 의도를 파악하였으나 통신사와 부사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조정에서는 조정을 장악했던 동인과 서인 사이의 다툼으로 이어졌습니다.
백성들이 동요할 것을 두려워한 동인은 동인 김성일의 의견에 따라 전쟁 위험을 무시했고, 각 도에 명하여 성을 쌓는 등 방비를 서두르던 것마저 중지시켰습니다.

C. 조선은 개국 후 200년 간 이렇다 할 전쟁을 치르지 않아 상비군 체제에서 병농 일치 예비군 체제로 전환된 상태였습니다.
조선의 군사력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D. 연산군 이후 명종대에 이르는 4대 사화와 훈구, 사림 세력 간의 계속된 정쟁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국가 재정이 취약하여 이루지 못했습니다.

2. 한산 해전 당시의  조선의 전쟁 상황

A.  1592년 5월 23일 (음력 4월 13일) 일본군이 약 20만 명으로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침략했고, 한산 해전은 음력 7월 8일이었습니다.

B. 6월 7일 (음력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전사하였고,  6월 11일 (음력 5월 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 여주, 양근(현 양평) 등을 거쳐 한양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21일(음력 6월 13일)에 평양이 함락되었습니다.

C. 선조는 한양을 탈출해 개성-평양-영변을 거쳐 의주로 달아났으며 명나라로 달아나려 했습니다.  음력 6월 27일 명나라로부터 망명 허락을 받았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선조는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시키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습니다.

D. 임진왜란 발발 전에도 왜군의 침략 가능성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군사력을 증강하지 않았고, 축성을 하는 등, 전쟁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다가옴을 느끼자 대책을 강구하려 했으나 평화에 길들여진 남부지방에서의 반발도 심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4월 14일에 선조는 수군을 없애고 모두 육군에 합류해서 싸우라고 명했습니다만, 이순신이 급히 아뢰어 호남 주둔 수군만 수군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배 약 20여 척)
경상 좌수사 박홍과 경상 우수사 원균은 조정의 명령에 따른다며 전함의 밑창을 뚫어 배를 물속에 가라앉히고 육군에 합류한다며 도주하였습니다.

E. 왕과 조정은 도망쳤지만 각 지의 백성들은 저항했습니다.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습니다.
조헌, 곽재우, 김시민,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 휴정 스님, 유정(사명당) 등이 거병하여 싸웠습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을 물리친 이유는 
(1)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
(2) 전국적인 의병들의 저항
(3) 백성과 관의 협력
이 3가지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백성은 위대합니다.

임진왜란 주요 싸움터 지도
임진왜란 당시 주요 싸움터



F. 이순신은 음력 음력 5월초 1차 출정에서 옥포 해전을 비롯한 3곳에서, 음력 5월말에서 6월초의 2차 출정에서  사천 해전을 포함한 4곳에서 이기고 있었습니다.

G. 와키자카는 1,600명의 군사로 5-8만여 명의 조선군을 이틀에 걸친 용인 전투에서 물리쳐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1592년 7월 13일 ~7월 14일/음력 6월 5일 ~ 6월 6일)
6월 6일, 아침을 먹고 있던 조선군을 기습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육상 전투 중 조선이 가장 어이없이 실패한 전투입니다.

H. 한산 : 용의 출현에 나오는 웅치(熊峙) 전투는 왜군이 전쟁이 장기화할 것을 대비하기 위하여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려고 진출하여 벌어진 것입니다.

6월 23일 전라도 공격을 맡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 의해 금산성이 점령됩니다.
7월 7일 왜군이 웅치로 몰려들었습니다.  7월 8일 새벽부터 왜군은 웅치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권율은 전라 감사 이광의 지시에 따라 남원에서 영호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고, 웅치는 김제 군수 정담, 나주 판관 이복남과 의병장 황 박 등이 왜군과 싸웠습니다. 저녁 무렵 웅치는 왜군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7월 9일 동복 현감 황진이 안덕원 근처에서 약화된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전주 공략에 실패한 왜군은 진안에 머무르나 7월 17일 금산으로 물러났습니다.

고경명 의병부대가 7월 10일 금산의 왜군을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고경명은 전사했습니다.

광주 목사 권율 장군은 그 후에 벌어진 이치 전투를 지휘하였습니다.
황박과 황진은 권율과 같이 싸웠습니다.

권율이 사위인 이항복과 얘기할 때 이치 전투를 자신의 제일 자랑스러운 전공이라고 했답니다. (이항복의 백사집)
이치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쳤기 때문에 왜군의 전라도 진군이 막혔습니다.

영화에서는 웅치 전투에서 황박이 전사를 하나 실제로는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 휘하에서 싸우다 8월 28일 전사했습니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는 웅치 전적비가 있습니다.

3. 한산 대첩 준비

A. 이순신의 1, 2차 출전 승리

1592년 5월, 1 차 출전에서 옥포(음력 5/7), 합포(5/7), 적진포(5/8)에서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첫 해전인 옥포 해전에서 왜 함 50척 중 26척을 침몰시켰습니다.

제2차 출전(음력 5월 29일-6월 9일)에서 10일간 4차례의 해전을 치렀습니다.
사천해전(5/29), 당포해전(6/2), 당항포해전(6/5), 율포 해전(6/7)
사천해전과 당항포해전은 적을 유인하여 격파한 해전으로서 한산해전의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B.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 명령

도요토미는 6월 23일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을 치라고 명합니다.
용인 전투에서 큰 승리를 한 해적 출신 와키자카를 남해로 보내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유명한 수군인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 (加藤嘉明) 등 3명을 소집하여 이순신을 공격하라고 합니다.

C. 와키자카의 단독 출전

38세였던 와키자카는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단독 출전을 감행하였습니다.

D. 김천손의 정보 전달

음력 7월 7일, 군마를 돌보던 김천손이 "왜 함대 70여 척이 견내량에 있다."는 정보를 전합니다.

E. 조선 수군의 매복과 유혹

음력 7월 8일, 이순신은 전라 우수군 절도사 이억기 부대를 통영 동호항 근처에 매복시키고 원균의 부대는 거제 화도 부근에 매복시킨 후에 광양 현감 어영담에게 빠른 판옥선 5척으로 와키자카의 함대를 유인하게 합니다.

F. 와키자카의 돌진과 학익진

와키자카는 왜선이 조선 배보다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돌격해 왔고 이순신 함대는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견내량에 매복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와키자카는 매복이 없자 빠르게 추격해 왔지만 후미와의 간격은 2km 정도나 벌어져 있었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침착하게 후퇴하며 학익진을 펼쳤고 거북선 2척이 돌격하며 왜선을 격파했습니다.

학익진도 가운데를 공략해 끊어 버리고 선상 백병전을 하면 승산이 있었으므로 와키자카는 빠른 속도로 돌진했지만 조선 수군들이 화포 공격으로 길게 공격해 오는 머리 부분을  차례로 격파하였습니다.
그리고, 매복해 있던 전라우수사 이억기 부대가 왜 함대의 옆구리를 공격했고 경상우수사 원균의 부대도 가세했습니다.

G. 겨우 도망간 와키자카

와키자카는 바다에 빠진 후 무인도(한산도로 추정)로 헤엄쳐 가서 10일 동안 돌미역을 먹으며 버티다가 파손된 배의 파편으로 뗏목을 만든 후 간신히 탈출했습니다.

4. 한산 대첩의 역사적 의의

A. 동아시아 최고의 정예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통일 전쟁을 거친, 동아시아 최고의 정예군이었습니다.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이겼다면 수륙 병진 작전으로 조선은 패망했을 것이고 일본군은 명으로 진격했을 겁니다.
한산도 해전에서 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수군과 교전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전세가 바뀌게 됩니다.

보급로가 끊겨 육지에서 싸우던 고니시 유키나가 등 육군 장수들은 전의 상실하여 남해안으로 퇴각하게 됩니다.

B. 남해의 제해권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두고 일전을 벌인 전투였습니다.
55척의 전선으로 적선 73척 중 47척을 침몰시켰고 12척을 나포했으며 일본 수군 6,000여 명을 수장시켰습니다.
조선 수군은 단 3명만이 전사했고 판옥선은 단 한 척도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의 실패로 도요토미 정권은 몰락하게 되며 에도 막부시대로 들어섭니다.

조총을 쏘려하는 와키자카
조총을 조준하고 있는 와키자카

C. 곡창 지대인 전라도 방어  

전라도 곡창 지대를 지켜내 군량미 조달이 가능했습니다.

D. 한국사의 3대 대첩과 임진왜란 3대 대첩

(1) 한국사의 3대 대첩

살수대첩
귀주대첩
한산 대첩

(2) 임진왜란 3대 대첩

진주대첩
행주대첩
한산 대첩

 

5.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배의 차이

A. 평저선과 첨저선


-판옥선은 통나무와 두꺼운 판자로 만들어져 속도는 느렸지만 견고하였음.
-밑이 평평하여 안정감이 있고 파도에 강하며 선회력이 좋았음. (평저선)
-좋은 선회력을 이용해 배를 돌려 재빨리 포를 쏠 수 있었음. (이에 대해서는  대포 장전 속도가 그리 늦지 않아서 돌릴 필요가 없었다는 반론도 있음.)
-배 위에서 포를 쏠 때 반동 흡수에 유리하여 명중률이 높았음.

-평저선은 파도에 취약하여 먼 거리 항해는 못했습니다.
-먼 거리 무역을 했던 고려시대에는 첨저선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첨저선은 배 바닥이 V자 형이라 직선 항해력이 좋아 빨랐음.
-선회력은 떨어졌고 바다 밑 암초에 부딪히기 쉬웠으며 파도나 물살이 빠른 곳에서 선회하다가 침몰하였음.

3D로 복원한 판옥선 자료-문화재청 그래픽=송수현
3D로 복원된 판옥선 자료=문화재청 그래픽=송수현 (출처 : 조선일보 2021년 10월 29일)

 

평저선과 첨저선
평저선인 판옥선과 첨저선 비교 사진 (출처: 두산백과)

 

평저선과 첨저선 단면도 비교
평저선과 첨저선 단면도 비교 (출처 : 나무 위키)



B. 배의 높이와 크기

임진왜란 초기에는 왜선의 높이나 크기가 조선 판옥선에 비해 작아서 대적이 안 되었습니다.
일본은 나중에 판옥선 만한, 안택선이라는 큰 배를 만들었으나 이 또한 첨저선으로 만들어서 약했다고 합니다.

C. 배의 재질과 화력 차이

조선 배는 참나무나 소나무를 사용해서 강했고, 일본 배는 삼나무나 전나무 등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일본 배는 만들기는 쉬우나 약했습니다.

판자와 판자를 연결하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조선 배는 참나무 못을 자 모양으로 박아서 연결했지만 왜선은 철 못을 일자로 박아 연결했습니다.

판옥선은 배가 튼튼해 많은 화포를 장착할 수 있었으나, 왜선은 구조적으로 약해 화포를 설치할 수 없었습니다. 
화포를 제조할 기술도 없었지만 수입한 화포도 배에 매달아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 수군과 왜 수군 간에는 화력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6. 의와 불의의 싸움

포로로 잡힌 '항왜(降倭)' 준사가 이순신 앞에서 이 전쟁이 무슨 의미인지 묻습니다.
이순신은 대답합니다.

"이 전쟁은 의와 불의의 싸움이다."

다음 장면에서 항왜 준사는 옳을 "義"라고 적힌 깃발을 잡고 늠름하게 서있습니다.
그는 의를 위해서 조국 왜를 배반하고 조선 측에 섰습니다.

의의 깃발을 들고 서 있는 항왜 준사


항왜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입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에는 항왜의 대표 격인 김충선을 배향한 녹동서원이 있고 그의 후손이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30년 뒤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일본 이름은 사야가(沙也加)로 우록 김씨의 시조가 됐습니다.

항왜 준사
항왜 준사의 모습


7. 해전 장면


A. 약 50분 동안 진행된 해상 전투 장면은 명량에서 보였던  장면보다 포격과 충파 등을 더 정밀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드론을 이용한 다양한 앵글에서 촬영한 장면도 보기에 좋았습니다.
B. 학익진 장면도 웅장하고 볼 만했습니다.

학익진에 접근하는 왜선들
학익진을 뚫기 위해 접근하는 왜선들

C. 거북선이 등장하여 돌격선으로 왜선을 부수는 장면도 통쾌했습니다.

거북선이 돌격대로서 왜선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학익진에 파괴된 왜선들
학익진에 파괴된 왜선들

8. 이순신

A. 일대기

-1545년에 태어남.
-1576년 무과에 급제 (31세),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1579년 훈련원 봉사
-1580년 전라도 발포 수군만호
-1581년 경차관 서익에 의해 파직당함
-1582년 훈련원 봉사로 복직
-1583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군관, 함경도 건원보 권관으로 지내다 3년간 부친상 치름
-1586년 함경도 조사보 만호에 임명
-1587년 함경도 녹둔도 둔전관을 겸임,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일부 백성이 납치된 후 반격 전쟁 치름. 함경북병사 이 일이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경비소홀의 책임을 물어 조정에 참수형 청했으나 이는 면했으나 백의종군 처분 받음
-1588년 시전부락 전투에서의 군공으로 복직됨
-1589년 전라 감사의 군관이 되었고 류성룡의 천거로 정읍 현감에 제수됨.  진도군수로 승진된 후 종 3품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되었고, 선조는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정 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전임시킴.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 (음력 8월 15일)
-1597년 투옥, 백의종군 처분, 모친상,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음력 8월 3일)
-1598년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전사 (53세)

(출처 : 나무 위키, 위키 백과)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B. 이순신의 장인과 류성룡

임진왜란 3년 전에 그는 정읍 현감이었습니다.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됐습니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장인, 무인 방진이 이순신에게 병학과 무술을 가르쳐 그의 길을 열어 주었고, 유성룡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전라 좌수사로 천거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C. 이순신 일화

(1)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사천 해전에서 이순신은 근접전을 하면서 활을 쏘다가 조총 탄환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당합니다.
이순신은 언제나 스스로 활을 잡고 부하들과 함께 활을 쏘니 장수들이 멈추기를 간청했으나, "나의 목숨은 저 하늘에 달렸다. 어찌 너희 장병들만 적을 감당하라고 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활을 겨누고 있는 이순신
나의 목숨이 저 하늘에 달렸다. 어찌 너희 장병들만 적을 감당하라고 하겠느냐.


그의 담대함과 솔선수범은 부하들의 존경을 이끌어 내어 헌신하도록 했습니다.

133척 대 13척이 대결했던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부하들이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하고 뒤로 물러서자 대장선 단독으로 적과 오랫동안 맞서 싸웠습니다.
그날 이순신은 죽을 각오로 싸웠을 것입니다.

(2) 이순신을 참수하라고 했던 이 일이 대사헌 윤두수에게 2가지 일화를 얘기합니다.

하나는 이순신이 훈련원 봉사 시절 병조정랑의 서녀를 첩으로 맞이하라는 청을 거절했고, 다른 하나는 전라 좌수영에서 근무할 때 좌수사가 군영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고 하니까 이순신이 "관물이라 마음대로 쓰지 못합니다."라고 거절해서 밉보였다고 합니다.

(3) 율곡 이이와 이순신이 동문수학한 사이인데 율곡이 병조판서이던 시절에 한 번 만나자고 하자 이순신은 " 군의 인사권을 가진 병조판서께서 부르신다면 사사로운 혈연 때문에 만나는 것으로 보이니 적절하지 못합니다."라고 거절했습니다.

(4) 이순신은 해전에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부하 장수들에게 제공하고 이를 엄격히 평가하여, 보고하는 장계에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각자의 공적이 공정하게 평가받도록 했습니다.
당시 천대받던 여러 분야의 기술자들을 고루 기용하고 이들의 공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5) 명량 해전을 앞두고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고는 피난민들에게 뭍으로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난중일기 1597년 9월 13일)

한산 해전에서도 이순신이 넓은 바다 쪽으로 유인해 학익진을 펼쳐 왜군을 상대한 이유도 전투에서 패한 왜군이 육지로 도망하여 백성들을 해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9. 저의 평가

A. 이순신의 관점 누락과 전쟁 준비에 협력한 백성들과 장군들 외면

이순신이 한산 대첩을 준비하는 과정과 고민, 학익진을 하게 된 이유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녹둔도에서 여진족과 싸우던 꿈 장면이 나오고 바다 위의 성을 쌓는다는 말을 하기는 했으나 부족합니다.

장수들과 협의하는 과정도 원균과 싸우는 장면 말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장수들과 회의를 하고 있는 이순신
장수들과 작전회의를 하는 이순신


지나치게 과묵하게 이순신을 표현하여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 그가 어떤 생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끝냈는 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한산 대첩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낸 이순신의 강한 정신세계와 이를 주위에서 도운 이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 시조를 읊은 이순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학익진도를 만들고 있는 이순신
학익진도를 만들고 있는 이순신


명량 때 받은 비판을 일부 수용한 "반(反)"의 작용으로 이해는 합니다만, 해전 모습에만 치중하였고 이순신과 그를 도운 수많은 백성들과 휘하 여러 장군들의 활동에 대해서는 시선을 외면하여 아쉬웠습니다.

그나마 명량에서 언어장애인으로 등장했던 정보름과 탐망꾼 임준영이 어떻게 만나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서사를 풀어 준 것은 좋았습니다.

위기에 빠진 임준영과 정보름
위기에 빠진 탐망꾼 임준영과 비밀 정보 요원 정보름

B. 지나친 와키자카 부각

이순신의 경쟁 상대로서 와키자카를 지나치게 부각하다 보니 실제보다 과장되었으며 등장하는 화면과 대사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견내량에 있던 와키자카 함대를 한산 앞바다로 끌어내려 이순신과 와키자카가 오랜 시간 동안 수 싸움을 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만,  이순신은 한산 대첩 후에 쓴 보고서에서 "판옥선 대여섯 척으로 선봉의 왜적들을 쫓아가 공격할 기세를 보이자 여러 척의 왜적들도 일제히 돛을 올리고 쫓아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출처 : 견내량파왜병장 見乃梁破倭兵狀/이충무공전서  2권/한국고전종합DB)

말을 탄 와키자카
말을 탄 와키자카

C. 역사극 또는 역사 영화의 허구성

역사를 다루는 역사 드라마나 영화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만들기보다는 약간의 허구를 가미하게 됩니다.

한산 : 용의 출현도 와키자카를 지나치게 부각한 점도 허구를 가미하였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생의 첩보원 설정, 거북선 설계도를 훔치는 왜군 첩자의 활동, 거북선의 목을 들락거리게 한 것, 가토 요시아키(김성균)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에게 수군을 빼앗기는 장면 등을 넣은 것도 허구의 일환입니다.

작가가 이런 허구를 이용하는 것을 관객들이 허용하는 이유는 그 허구성으로 인해 작가가 주장하는 바를 또렷이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뭐를 주장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려한 해전 장면은 있지만 이순신도 없고, 조선 백성의 고난과 인내도, 인간애도 없습니다.
이순신은 없고 "해전"만 보입니다.

명량은 각본을 작가와 같이 썼지만 한산은 감독이 작가와 갈등을 빚는 게 싫어서 혼자서 다 썼다고 하는데 그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거라고 보입니다.

"노량 : 죽음의 바다"를 제작할 때는 꼭 작가가 각본을 쓰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D. 저의 평가

평단에서는 좋은 평가를 주었습니다만 저의 평가는 ★★★입니다.

저는 명량이 신파와 국뽕, 격군들의 대사 등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오히려 한산 보다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명량 포스터
1700만명이 본 명량 포스터


133척과 맞서 이긴 13척의 전투, 죽음을 각오하고 대장선 혼자 오랜 시간 동안 싸우는 결기, 휘하 장군들의 활약 등이 더 많은 관객을 초대했다고 봅니다.

1700만 명 관객이라는 국내 역대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명량의 기록을 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10. 참고 사항

A. 제목 중 "용의 출현"

제목에 왜 [용의 출현]이라고 했을까요?

거북선 머리에 부착한 용머리 때문입니다.

B. 한산 (韓山과 閑山)

영화에서 이순신은 한산을 큰 산이라 합니다.
한밭을 큰 밭  즉,  大田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는 한산이 충남 서천군 한산면의 韓山과 같았습니다.
한(韓)은 '나라 이름 한'입니다만  '크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한산 대첩 후에 '가로 막을 한'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1861년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閑山島로 적혀 있습니다.

자는 주로 '한가할 한'으로 많이 쓰입니다만 '가로 막을 한'으로도 쓰입니다.
閑山島는 가로 막을 산의 섬이라는 뜻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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