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남한이 공산화 되지 않은 이유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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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남한이 공산화 되지 않은 이유를 아십니까?

by 숲의새 2022.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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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전쟁 발발 당시 남한은 북한의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남한은 북한을 물리치고 자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거의 멸망직전까지 가서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일본으로 피신하라고까지 했던 6.25때 공산화되지 않은 이유를 아시나요?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을 때 남한은 북한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를 상대로 전쟁을 했으며 북한군에 의해 거의 점령 당할 뻔하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할 힘을 얻고 UN군 참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어떻게 UN군이 남한을 도울 수 있었으며 어떤 과정으로 남한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지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알아야 한다고 생각되어 간단히 요약해 봅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는 상처와 갈등과 모순 투성이이며 피의 역사입니다.
또한 기적의 역사입니다.
보기 싫고 알기 싫으며 불편해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 자식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1. 미군정에서 실행한 여론조사 결과

1946년 8월 13일 자 동아일보에 의하면, 미군정청 여론국이 전국 8,453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국민의 77%가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좋다고 답했습니다.
자본주의는 14%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출처 : 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 자)

1946년 8월 13일 동아일보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 주는 도표/자본-공산-사회 주의 선호도 조사
1946년8월13일 동아일보 여론조사 결과
 

 

1945년 8월 13일 동아일보 여론조사 보도 기사
 

 

그만큼 우리 국민들이 좌우논쟁이 치열하던 그때에는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선호했었습니다.
칼 막스의 이론에 근거하여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난 후 평등을 강조하던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세상에 널리 퍼져 있던 때였습니다.
많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105년, 6.25 전쟁이 발발한 지 72년이 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좋다고 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제도는 아니지만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낫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되었고, 고르바초프가 1991년 12월 26일 소련 붕괴를 선언했으며, 등 시아오핑이 흑묘백묘론을 내세워 자본주의 일부 제도를 받아들여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개인의 경제활동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북한 주민의 피폐한 삶도 칼 막스의 사상이 현실에 적용될 때 실패했음을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의 본성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한계점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2. 남한의 전쟁 대비

북한이 침략해 왔을 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북한군이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고 바로 남쪽으로 진격하지 않고 3일간 서울에서 지체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왜 북한군이 서울에서 사흘간 머물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 3일 동안 UN에서 남한을 도우기로 결의도 하고 파견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었고 남한군은 전쟁에 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습니다. (미국 참전일 : 6월 27일/영국과 호주 참전일 : 6월 29일 등)

 

6.25 당사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비교표 1

 

6.25 당사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비교표 2
자료 : 국방부

3. UN군 참전 스토리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건국했고, 북한은 1948년 9월 9일에 건국을 했습니다.
한 나라가 건국을 하게 되면 UN으로부터 인준을 받아야 합니다.
당시 1948년 9월 21일 오후 3시 30분에 파리에 있는 샤요궁(Palais de Chaillot)에서 제3차 UN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남북한이 모두 파리 UN총회에 대표단을 파견했습니다.

남한은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선출된 입헌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8월 11일 장면이 이끄는 대표단 5명을 보냈습니다. 장면이 가톨릭 신자로서 '보이지 않는 손' 로마 교황청의 지원을 얻도록 했습니다.

1948년 12월 12일이 제3차 UN총회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12월 6일 회기 종료 6일을 앞두고 총회 상정을 위해 넘어야 하는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되기 시작했고 한국 대표 초청 동의안도 채택되었습니다. 12월 8일 제1 위원회는 한국 독립 승인안의 총회 상정을 결정했습니다. 총회 상정 첫날부터 소련대표가 한국 독립 승인안이 상정되기만 하면 의사진행 발언을 길게 끌어 승인안 상정을 계속 방해했습니다.

12월 11일 밤에 가톨릭 신자인 장면 박사가 대표단을 이끌고 가까운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고, 국내에서도 국무위원들도 기도를 했으며 한국의 전국 교회에 기도를 부탁했었습니다.

마지막 날인 12월 12일에도 소련 대표가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한국 독립 승인안 상정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련대표의 목에 결절이 와서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원래는 소련대표가 2시간, 또 다른 위성국가였던, 헝가리, 체코 등 6개 국가 대표들이 시간을 나누어 방해를 하려 했으나 다른 대표들은 회의장 밖에서 차를 마시고 얘기를 나누다가 소련대표가 병원에 실려 간 것을 모르는 새에 해당 안이 표결에 부처 져 통과되어 버렸습니다.

찬성 48/반대 6/기권 1/결석 3으로 말입니다.
1948년 12월 12일 일요일 오후 5시 15분이었습니다.

북한 안은 찬성 6/반대 48/기권 1로 부결됐습니다.

남한은 UN이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고, 북한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1948년 12월 12일 제 3차 유엔 총회 표결 결과
1948년 12월12일 유엔 총회 대한민국 승인 표결 결과

 

1948년 제 3차 유엔 총회가 열린 파리 샤요궁
1948년 제3차 유엔총회가 열린 프랑스 파리 샤요궁. 에펠탑 맞은편에 있다.
 

 

장면 수석의 수첩 메모-표결 결과가 적혀 있다.
장면 수석대표의 수첩 메모. 12월 12일 기록에 한국문제 표결. 찬성 48, 반대 6, 기권 1(스웨덴), 결석 3이라고 썼다.


1년 6개월 뒤 6.25 전쟁이 나자 UN은 자신들이 인정한 국가가 침략을 받게 되었으므로 당연히 UN군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하고자 했으나 5개국의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가들(미국/영국/프랑스/중국/소련) 중 한 나라만 반대를 해도 파견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소련 대표(말리크)가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나타나지 않아서 4개국이 UN군 파견을 결정해 버렸습니다.
왜 소련대표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역사학자들도 설명을 못합니다.

만약,
1948년 12월 12일 파리 UN회의에서 소련대표가 회의 진행 방해를 할 때 목에 결절이 오지 않았다면,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을 머물지 않고 남쪽으로 진격했다면,
UN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 회의에 소련대표가 참석해서 UN군 파견에 반대를 했다면,

남한은 공산화되었을 겁니다.

저와 같은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기적으로 여깁니다.

1999년 6월 26일 방송된 KBS 역사스페셜,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에서는 춘천전투에서 남한군이 북한군을 잘 방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북한군은 여러 방향으로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 6사단/1사단/4사단/3사단은 개성, 동두천, 문산, 포천을 거쳐 서울로, 2사단[북한 최우수 부대로 선정됨]은 춘천으로, 12사단[중국 내전에도 참여한 사단]은 홍천으로 진격)

아래 북한군 남침 작전도는 북한군으로부터 획득한 것인데 1950년 6월 22일 작성된 것입니다.

북한의 남침 작전도 (1950년 6월 22일 작성)
북한군 남침 작전도

<북한군 남침 작전도>=선제타격 작전도(미군 개입 전에 전쟁을 끝내려 함.)
-1단계는 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 (남한의 주력부대를 포위해서 섬멸한다는 것)
-2단계는 전과 확대 및 예비대 섬멸
-3단계는 소탕작전 및 남해안 도달로 나누었음.

 

6.25 당시 춘천 지구 전투 부대 배치 현황
6.25 당시 춘천지구 전투부대 배치 현황


춘천을 통해 수원을 점령하게 되면 서울에서 밀려 내려올 남한의 주력 부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포위, 섬멸한다는 전략을 구사했으나, 춘천에서의 실패로 한국 주력부대를 섬멸할 수 없었다고 분석합니다.
한국군 6사단 7 연대가옥산포에서 잘 방어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습니다. (옥산포가 보이는 우두산에 진지를 전쟁 발발 전에 잘 구축하여 가능했음.)
그리고, 춘천으로 들어가는 소양교에서도 잘 방어했습니다.
6사단도 결국은 6월 27일 저녁에 철수하게 되나 3일이라는 시간을 지연시켰습니다.
전쟁 초기에 3일은 엄청난 시간입니다.

홍천 쪽으로 남침한 북한군 12사단 탱크부대를 6월 28일, 말고개에서 막은 것도 6사단 2 연대 육탄 돌격대 11명입니다.
한국전쟁사에서 6사단은 조국을 구한 사단으로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해당 KBS 역사스페셜을 아래에 링크했사오니 시청해 보십시오.

UN군 참가자와 부상, 사망자수
자료: 국방부

 

4. 박헌영의 자충수

100만 명의 당원들을 가진 공산당의 박헌영은 자금난에 허덕이다가 뚝섬에 있던 근택 빌딩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을 매입하여 밤중에 위조지폐를 계속 찍어 내다가 미군정에 발각되어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1946년 9월 7일,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간부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역사에서는 이를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라고 합니다.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 조선 공산당원 7명이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입니다. (1946년 여름에 발각됨.)
이 사건으로 인해 공산당은 지하로 숨어들게 되었고, 박헌영은 영구차를 타고 북한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 남한 단독으로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고 테러 등의 행위를 하며 선거를 방해했습니다.

만약 공산당이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자들을 내서 국회의원에 많이 당선되었다면 헌법을 제정하고 법률을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제헌 국회는 물론 국내 정치에 상당히 좋지 않은 힘을 행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 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은 자충수를 둠으로써 이러한 위험 요소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5.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

남한의 토지개혁은 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 10일에 농지개혁법안 (제128호)이 공표됨으로써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3월 25일에 시행령 공포/4월 28일에 시행규칙 공포되었으나 3월 10일까지 농가별 분배농지 일람표가 리와 동별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3월 15일에서 3월 24일에 시/읍/면사무소에서 열람하고 이의 없으면 4월 15일부터 농지분배 예정통지서가 발송되었습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법에 따라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농지의 70-80% 정도까지 분배가 시행되었다고 합니다. (보리수확과 벼 모내기 철인 6월 전에 마치려 했습니다.)

당시 남한에는 약 100만 명(정예 10만, 방계조직 100만)의 남로당원이 있었습니다.
위조지폐 발행 때문에 지명 수배된 박헌영은 1946년 9월에 북한으로 도망가서 남한의 인심을 몰랐습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한을 침략하기만 하면 남로당원들 20만 명이 불같이 폭동을 일으켜 동조할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박헌영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북한이 침략했을 때 폭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주된 요인으로 남한이 시행한 토지개혁을 듭니다.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으나 남한은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유상 수용 유상분배 원칙으로 개혁을 했습니다.

남한에서는 지주 계층이 토지개혁에 반대하자 급진적 사회주의자인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해 밀어붙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전체 농가의 75%가 소작농이었지만 개혁 후에는 전 경지의 92.4%가 자작농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결과 신분제도가 무너지고 일시적이나마 평등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5000년간 지속되어 오던 신분제가 없어진 것입니다.

북한은 무상 분배했던 토지를 1954년 11월부터 빼앗아 협동농장을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농업생산성은 떨어졌고 농민은 농사지은 것은 모두 국가에 바쳤고 겨우 살아남을 만한 식량만 분배받게 되었습니다.

이 토지개혁이 당시 다수였던 농민들이 공산당에 동조하지 않게 한 주된 이유 중 하나였고 향후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주요 내용 출처 : 김진홍 목사 2021년 6월 13일 설교-6.25 전쟁에서 일어난 기적 5가지 <1>)

▶KBS 역사스페셜-한국전쟁 초대의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1999/6/26)를 링크합니다.

KBS 역사 스페셜  한국전쟁 초대의 미스터리,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1999년 6월 26일) 동영상

북한군 서울 주둔 3일의 미스터리 (출처-KBS 역사 스페셜 / 1999.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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